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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글 꼬투리

다들어줄 개



인식이 많이 바뀌었다고는 하나, 아직도 관공서를 방문하는 사람들은 왠지 모르게 주눅이 들곤 합니다. 접수대를 사이에 두고 느끼는 거리감과 단절된 느낌은 아쉬운 것이 많은 민원인일수록 더 크게 다가올 것입니다.

최근에 국민신문고에 두 번에 걸쳐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민원을 신청하면서, 그런 느낌을 받았습니다. 관계 공무원이 이 글을 보면 섭섭해 할지 모르지만, 우리말에 대한 사랑으로 그 미안함을 무릅씁니다.

 

처음 것은 내용이 중복되어 있어서, 두 번째 글부터 소개합니다.

    

안녕하십니까. 일전에 다음과 같은 민원을 제시하였습니다.

<래전에 교육부 명의로 된 포스터가 학교에 배부되었습니다.(첨부파일1 참조) 그 내용을 보니, "너의 이야기를 다 들어줄 개"를 포함하여 "~할게."라고 하는 약속의 뜻이 있는 어말 어미를 "~할 개"로 표현한 것이 여러 개 있었습니다.

최근에 주관 단체가 어디인지는 모르겠으나 위의 포스터와 연관이 있는 듯한 또다른 포스터가 배부되었는데(첨부파일2 참조), 그곳에도 동일한 문구가 있었습니다.

물론 그 포스터를 제작한 담당자가 청소년들에게 친근하게 다가가기 위해 동물을 연상하는 "~할 개"를 쓴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근래 들어서 청소년들이 우리 어법에 맞지 않는 표현을 아무 거리낌 없이 쓰는 경향이 있습니다. 게다가 공중파 매체에서도 한몫 거들고 있는 형편입니다. 우리 언어 생활을 위해서 바람직하지 않은 현상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한 나라의 교육 정책을 책임지고 있는 교육부에서, 단순한 편의성을 위해 그런 시류에 편승하고 있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담당자는 한시 바삐 그 포스터를 회수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교육부 산하 단체인지는 모르겠으나, 상담센터의 이름인 '다들어줄개'도 바꾸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앞으로 이런 문제가 재발되지 않도록 노력을 기울여주시기 바랍니다.>

   

며칠 뒤에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은 답변을 받았습니다.

 

<(전략)

. 귀하의 민원 내용은 다들어줄 개의 어법 표기에 대한 것으로 이해됩니다.

. 우리 부에서는 청소년 및 학생의 자살(자해)예방을 위해 청소년의 발달 특성을 고려하여 시·공간 제약 없이 SNS 매체를 통한 36524시간 상담 받을 수 있는 모바일 기반 문자상담 서비스인 다들어줄 개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 해당 서비스 제공 전 명칭 공모 및 의견 수렴 등을 통하여 강아지처럼 포근하고 친근한 이미지를 앞세워 상담에 대한 거부감을 낮추며, 사업 내용에 대해 명시적으로 표현다들어줄 개가 선정되었으며, 표기적인 부분을 바탕으로 고민을 모두 들어주는 친근한 개(강아지)의 아이콘을 사용하는 '다들어줄 개'가 사용되게 되었음을 안내드립니다.

(후략)>

 

제가 원하는 답변은 다들어줄 개를 사용하게 된 경위 설명이 아닙니다. 그 표현이 청소년들의 올바른 언어생활에 지장을 초래할 수도 있으니, 개선해 달라는 것입니다. 친근한 이미지를 내세우는 것도 좋지만, 그것 때문에 굳이 문법을 어겨가면서 강아지를 내세울 이유는 없다고 봅니다. 차라리 바다에 사는 를 내세웠다면, 문법적으로도 문제가 없으니 이해될 수도 있겠습니다.

제 의견이 잘못되었으면 그 이유를 말씀해 주십시오. 맞는 의견이라면 바로 개선책을 마련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좋은 답변 기다리겠습니다. 바쁘신 와중에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두번째 민원에 대한 답변을 듣기까지는 좀 시간이 걸렸습니다.


(전략)

. 귀하의 민원 내용은 다들어줄 개의 문법 표기 오류에 따른 개선책 마련 요구로 이해됩니다.

. 이와 관련하여 이전에 민원인님께서 주신 민원에 대해 다들어줄 개의 명칭 사용 경위를 안내드린 점은 우리 부에서 36524시간 운영 중에 있는 모바일 기반 문자상담 서비스 다들어줄 개의 고유 명칭의 뜻을 설명드리기 위함이였습니다. 따라서, 해당 명칭은 민원인님께서 제기하는 문법적인 오류보다는 우리 부에서 제공하는 상담서비스의 고유 명칭임을 안내드립니다.

. 귀하의 질문에 만족스러운 답변이 되었기를 바라며, 답변내용에 대한 추가설명이 필요한 경우 교육부 학생건강정책과(○○○ 교육연구사, 044-203-○○○○)로 연락주시면 친절히 안내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기다리는 설렘이 큰 만큼, 민원 내용의 핵심을 피해 가는 답변에 대한 실망도 큽니다.

답변 아래에 민원만족도조사가 이어집니다.

 

만족 또는 불만족하신 사유 등 의견이 있으시면 작성해 주시기 바랍니다.

 

<동문서답이라는 말이 그대로 적용되는 답변입니다. 문법적 오류가 청소년에게 미치는 악영향에 대해 의견을 제기했는데, '고유 명칭이니 오류가 있어도 괜찮다'는 답변을 보고 경악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시민의 목소리에 진정성을 가지고 대하는 공무원의 모습을 기대한 것이 무리였나 생각해 봅니다.>

 

친절하게도 담당자가 만족도조사의 내용을 읽어 본 모양입니다. 추가답변을 받았습니다. 이전 답변의 도돌이표입니다.

 

안녕하세요? 교육부 학생건강정책과입니다.

먼저 국민신문고 만족도 평가에 참여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부득이하게 민원인께 만족스럽지 못한 답변을 드렸습니다.

민원인님께서 주신 민원에 대해 고유명칭임을 안내하여 드린바 있습니다. 이는 해당 서비스를 운영하는 교육부에서 이름을 '다들어줄 개'로 지었다는 말씀을 드린 사항임을 재차 안내하여 드립니다.

문법에서 '명사'란 사물 등의 이름을 가르키는 품사로 정의하고 있으며, 제 답변은 해당서비스의 이름. 즉 명사임을 안내드린 사항임을 알아주시기 바랍니다.

(후략)

 

또다시 불만족 사유를 적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음과 같이 말이죠.

 

담당자님의 추가답변에 감사드립니다.

재질문에 대한 답변이 많이 아쉬웠지만, 귀찮게 해 드리는 것 같아서 민원 제기를 그만하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저의 민원 내용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신 것 같아서, 다시 정리하여 드리겠습니다.

1. 실제로 멍멍짖는 개가 청소년의 고민을 들어주는 프로그램이라면, '다 들어줄 개'라는 명칭을 사용하는 것에 이의를 제기할 이유가 없습니다. '청소년의 고민을 다 들어주는 개[]라는 본래의 뜻이 살아있으니까요. 하지만 당연히 현실성이 없는 이야기입니다.

2. 상담사가 청소년의 고민을 들어주는 프로그램이겠죠. '청소년의 고민을 다 들어주겠다.'는 약속이나 의지의 의미일테니, 당연히 문법적으로 맞지 않은 표현입니다. 이름이므로 문제가 없다고 말씀하셨는데, 굳이 문법을 어겨가면서, ‘다 들어줄게를 놓아두고 다 들어줄 개를 고유명사화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청소년의 고민보다 올바른 우리말을 지키는 것이 덜 중요한 것일까요? 표준말이나 맞춤법 규정을 지킬 수 있는 새로운 명칭을 찾아내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일까요?

한때 침대는 가구가 아닙니다. 과학입니다.’라는 광고 문구가 문제된 적이 있었습니다. 일부 청소년들이 교육부에서도 쓰는 표현이니, ‘내가 너의 이야기를 다 들어줄개.’를 맞는 표현으로 이해하는 일이 생길까 걱정입니다.

이미 시행 중인 사업이라 중간에 고치는 것이 어려운 일일 것이라고 생각은 합니다. 하지만 외국어와 비속어에 청소년들이 많이 노출되어 있는 현실에서, 교육 관계자들이 올바른 우리말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장황한 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