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의 남성들에게는 피해 갈 수 없는 관문이 하나 있습니다.
병역의 의무, 곧 군대에 가는 것이죠.
입대할 때에는 가난한 양반 향청에 들어가듯 하던 사람들도 복무를 마치고 나면, 힘든 시간을 잘 참아냈다는 사실에 대해 은근한 자부심을 보여 주기도 합니다. 남자들은 환갑 때까지 군대 이야기 한다는 말도 있으니까요.
나는 강원도 철원과 화천 사이에 주둔해 있는 부대에서 근무했었습니다.
참 깊고 깊은 산골짜기였죠.
오래전의 일이라 이젠 많이 변하였겠지만, 6월 하순에 근무지에 도착하였을 때, 입구에 하늘하늘 피어있었던 코스모스는 아직도 머릿속에 생생합니다. 초여름에 코스모스라니...
그 당시 기억 중의 하나.
부대 앞 군사도로에 낡은 콘크리트 다리가 하나 놓여 있었는데, 거기에 이런 팻말이 붙어 있었습니다.
전차 좌회
전차(戰車)는 당연히 무한궤도를 갖추고, 두꺼운 철판으로 장갑(裝甲)하고, 포와 기관총 따위로 무장한 차량, 즉 탱크(tank)를 말합니다.
그런데 ‘좌회’라니요.
무거운 전차가 다리를 건너가면 붕괴될 위험이 있으니 왼쪽으로 돌아서 가라는 뜻인가 본데, 아쉽게도 좌회전(左回傳)이라는 말은 있어도 좌회(左回)라는 말은 사전에 나와 있지 않습니다.
우회(迂迴 : 곧바로 가지 않고 멀리 돌아서 감)를 우회전(右回轉 : 차 따위가 오른쪽으로 돎)의 줄인 말이라고 오해한 탓입니다.
얼마전에 남한산성에서 성곽 길을 걷다가, 성곽을 보수하는 공사 현장에서 그것과 비슷한 표현을 또 보게 되었습니다.
"좌회하세요"
마치 기시감(旣視感 - 프랑스어로는 데자뷔라고 함)을 경험하는 것 같았습니다.
왜 이런 일들이 시공을 초월해서 나타났을까요?
그것은 한자에 대한 지식이 부족한 탓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나는 국어를 전공하고 가르치면서, 우리의 언어 생활에서 한자에 대한 지식이 꽤 중요하다는 것을 절감하여 왔습니다. 우리말의 70% 이상이 한자어이거나 그 연원을 한자에 두고 있기 때문이지요.
몇 가지 예를 들어볼까요?
1) 순우리말인 줄 알기 쉬운데 사실은 한자어 인 것.
- 귤(橘), 도대체(都大體), 물론(勿論), 미안(未安), 수작(酬酌), 심지어(甚至於), 어차피(於此彼), 오밀조밀(奧密稠密), 주전자(酒煎子), 짐작(斟酌), 포도(葡萄), 하필이면(何必--), 호랑이(虎狼-)
2) 순우리말인 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한자어가 변형된 것.
- 가난(←艱難, 간난), 김치(←沈菜, 침채), 동네(←洞里, 동리), 사글세(←朔月貰, 삭월세), 사냥(←山行, 산행), 썰매(←雪馬, 설마), 양치질(←楊枝-, 양지-), 재미(←滋味, 자미), 초승달(←初生-, 초생-)
3) 심지어는 붓글씨 쓸 때 쓰는 '먹'은 그것의 한자인'묵(墨)'보다 더 고대 중국의 발음에 가깝다고 합니다.
빙산의 일각에 불과할 뿐, 위와 같은 예를 찾자면 끝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일상의 문자 언어 생활에서 한자를 꼭 사용하자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말을 좀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 한자에 대한 지식을 활용하자는 것입니다.
라틴어는 오랜 역사를 통해 직간접적으로 유럽 각국의 언어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고 합니다.
영어 표현 중에 pros and cons[찬반 양론, 이해득실]라는 표현이 있는데, 이 단어는 표현 자체가 라틴어입니다. carpe diem[현재를 즐겨라]라는 표현이 라틴어라는 것도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영어 단어 dome(반구형 지붕), gravity(중력), habit(습관), relieve(덜어주다) 등, 라틴어 dom(지붕), gravis(무거운), habere(갖다), levis(가벼운)을 어원으로 하는 것을 포함하여, 영어 어휘의 절반 이상이 라틴어에서 온 것이라고도 합니다.
그래서 유럽에서는 그들의 언어를 잘 이해하기 위해서 학생들에게 라틴어를 가르친다고 합니다.
문화는 강처럼 흐르는 것입니다. 유럽 사람들이 라틴어를 배우면서 그들의 문화와 언어를 이해해 나가는 것처럼, 한자 문화권에서 역사를 일구어 온 우리가 한자를 배우는 것은 결코 불필요하거나 수치스러운 일은 아닐 것입니다. 오히려 한자를 철저하게 배격하자는 주장이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또 다른 의미의 국수주의로 부정적 태도라고 할 것입니다.
연전에 우리나라와 일본, 중국의 각계 저명인사로 구성된 ‘한,중,일 30인회’라는 곳에서 3국 공통의 상용한자 800자를 선정해 발표한 적이 있습니다. 3국 간에 과거사, 영토, 정치 등 여러 분야에서 갈등이 심화되고 있는 가운데 공통의 상용 한자를 책정함으로써, 아시아의 공유 가치를 확산하고 세 나라 미래 세대의 교류를 보다 활성화하자는 인식에서 나온 결과라고 합니다.
그 취지와는 별도로 이 800개의 한자를 잘 알아두면, 정확하고도 풍부한 어휘력을 갖추는 데에 큰 도움이 될 것으로 보입니다.
한자 한중일 공통 800자를 정리해 놓은 사이트를 소개합니다.
http://news.joins.com/article/12017516?ctg=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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