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말글 꼬투리

화장품 광고 해독하기


중국도 중화인민공화국(북경)과 중화민국(타이완)으로 나뉘어 있으니, 따지고 보면 우리와 마찬가지로 분단의 아픔을 겪고 있는 나라입니다.

세세한 사정이야 다른 부분도 있겠지만, 피붙이들끼리 서로 자유롭게 왕래하지 못한다는 것은 불행일 수밖에 없습니다.

서로 다른 정부의 체제 아래서 오랜 세월이 흐르니, 언어와 문자 정책에도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 번체자(繁體字) : 현재 타이완에서 쓰는 문자.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전통적인 모습의 한자입니다.

- 간체자(簡體字) : 북경에서 쓰는 문자. 원래의 한자가 획수도 많고 글자수도 많아 번거롭기 때문에, 실용성을 고려하여 옛 것을 간단하게 고쳐 쓴 문자로 알고 있습니다. '간체자'도 简体라 씁니다.


한자를 좀 알지만, 특별히 중국어를 배우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번체자를 대하는 것이 마음 편합니다.

한번도 배운 적이 없는, 아랍 문자나 러시아 문자를 본다면, 전혀 알아볼 수 없으니 아예 그림을 보듯이 편하게 넘어갈 수 있는데, 북경이나 칭따오 등지에 가서 간체자를 보면, 얼핏 알 것 같은데 끝끝내 그 글자의 정체를 파악하지 못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니, 갑갑증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사실 멀리 갈 것도 없이, 그런 갑갑함은 우리 주변에서도 얼마든지 느낄 수 있습니다.

간체자야 글자 자체를 읽기 어려우니 그렇다 치더라도, 분명히 한글로 쓰여 있어서 또박또박 제대로 읽었는데, 막상 그 뜻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라면 황당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헤드라인이나 셰프, 퓨전 같은 단어는 벌써 우리말 깊숙히 들어와 있으니 무슨 말인지 알 수 있겠습니다.

리뉴얼오픈, 캐노피, 디톡스 같은 말들은 필요하면 사전을 찾아가며 성의를 가지고 그 뜻을 이해해야 합니다.

제주 VTS, 모빌 오피스, 서울형 데이케어센터쯤 들어가면 글쎄요. 확실한 이해가 요원해집니다.


뭐니 뭐니 해도 압권은 화장품 광고입니다.

오늘은 '화장품 전문가의 글을 정확하게 해독하기'라는 어렵디 어려운 작업에 한번 도전을 해보려고 합니다.

참고로 '해독'이라는 말을 사전에서 찾아보니 다음과 같이 풀이되어 있습니다.

해독(解讀)

1」어려운 문구 따위를 읽어 이해하거나 해석함.

「2」잘 알 수 없는 암호나 기호 따위를 읽어서 풂.

두번째 뜻이 더 와 닿습니다.


제목부터가 만만치 않습니다. 우선 영어 사전부터 펼쳐야겠습니다.

- seductive cherry red : cherry red는 알겠습니다. 체리 빛 붉은색이라. 선홍색이라고 번역할까요?. 그런데, seductive, 이 단어는 제법 어렵습니다. 영어 공부 좀 열심히 할 걸 그랬습니다. 사전에는 '매혹적인, 매력적인'이라고 나와 있네요. '매력적인 선홍색'으로 정리하겠습니다.


바로 이어지는 '메이크업 아티스트'. 억지부리지 않겠습니다. '화장 예술가' 정도의 뜻이겠죠.

하지만, 그 이후에도 '컨투어링'이니, '셰이드 앤 일루미네이트'이니 하는 암호 같은 외국어의 덫을 하나하나 제거해 나가는 일이 너무 어려워, 열댓 줄 문장을 해석하는 데에 꽤 많은 시간을 썼습니다.

그 결과물을 공개합니다.


붉은 입술 돋보이기에서는 윤곽 그리기가 핵심이에요. 이는 ○○(아마 화장품 회사 이름인 듯.)의 핵심 철학이라고도 할 수 있죠. 기초 화장품으로 피부 색조를 균일하게 정리한 뒤, 셰이드 앤 일루미네이트(제품명인가요? 밝기 조절용 화장품으로 해석해 봅니다.)를 이용해 광대뼈를 중심으로 강조색을 바르고 외곽과 볼 아래쪽에는 어두운 색깔을 발라 얼굴을 입체적으로 살려줍니다. 이 제품은 부드럽고 매끈해서 얼룩 없이 손가락으로도 쓱쓱 잘 발리죠. 눈에는 아이컬러 쿼드 골든밍크(상품 이름인 듯, 해석은 도저히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의 속이 들여다 보이는 색(투명하다는 뜻인가)을 눈매 전체에 '가로로 길게 표현한다'는 느낌으로 부드럽게 발라 주세요. 그런 다음 원색조의 반짝반짝 빛나는 색깔을 눈두덩에 살짝 얹어 주면 매력이 넘치는 눈매가 연출되죠. 마지막으로 고전적인 붉은색에 약간 선홍색 연지인 체리러쉬(이 역시 상품명인 듯합니다.)를 입술에 꽉 채워 바르면 유혹적인 저녁의 입술 화장이 완성됩니다.


화장에 익숙하신 분이 이해하기에는 오히려 더 불편할까요?

하지만 문외한들에게는 많은 도움이 되었을 것입니다.

국경 넘어 세계를 마음껏 돌아다니는 시대에 왠 국수주의적 사고냐 할지 모르지만, 앞으로도 오랫동안 민족의 개념은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사피어가 말한 것처럼 "언어가 사고를 지배한다."면, 민족으로서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서 무분별한 외국어의 사용은 삼가야 하지 않을까요?


'말글 꼬투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위 아래 위 위 아래  (0) 2017.12.21
삐딱하게 신문 보기  (0) 2017.12.07
I SEOUL YOU  (0) 2017.03.24
시무식  (0) 2017.02.03
늦둥이들을 위하여  (0) 2016.12.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