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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글 꼬투리

나라에 감사하자

 

또 한번 플래카드에 대한 꼬투리.

플래카드의 힘은 대단합니다. 우리의 뇌리에 오랫동안 깊은 인상을 남겨 놓습니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선전용으로, 관공서 홍보용으로, 행사 알림용으로, 때에 맞추어 길거리 곳곳에 플래카드가 걸립니다. 그런데 '무엇'의 눈에는 '무엇'만 보이나 봅니다. 문구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보니, 틀린 표현들도 심심치 않게 눈에 뜨입니다. 그중에 하나.

 

6월 가까이 되면 매년 서울오륜초등학교 정문에 보훈의 달 플래카드가 걸렸습니다.

"나라를 사랑하고 감사하는 오륜 어린이". 몇 해째 바뀌지 않고 똑같았던 것은 아마도 비용을 절감하려는 노력일 것입니다.

그런데 플래카드의 문구가 눈에 거슬렸습니다.

문장 성분간에 호응이 잘 안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내년에는 다른 것으로 바뀌겠지 바뀌겠지 하며 기다리다가 지쳐서, 결국은 학교에 건의를 하게 되었습니다.

 

오륜초등학교 교장 선생님께

...(중략)...

제가 이렇게 글을 쓰게 된 것은 학교의 정문에 걸려있는 플래카드에 대해 건의할 것이 있어서입니다. 벌써 몇 년째 6월이 되면, ‘나라를 사랑하고 감사하는 오륜 어린이’라는 내용의 플래카드가 걸려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아이들의 애국심을 고취하려는 교육적 목적으로 걸어 놓은 것으로 이해가 됩니다.

문제는 표현에 있습니다.

‘나라를 사랑하는’ 것은 맞지만 ‘나라를 감사하는’ 것은 맞지 않으므로 문장 성분을 생략하여 쓸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나마 살아난 것을 신께 감사하고 있다.(표준국어대사전에 나오는 예문)”처럼 “~을 ~에게 감사하다”라고는 쓸 수 있지만 “신을 감사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문구를 ‘나라를 사랑하고 나라에 감사하는~’으로 바꾸든지, 아니면 이번 기회에 다른 올바른 표현으로 바꾼, 새 플래카드를 걸었으면 하는 부탁의 말씀을 드립니다.

...(후략)...

 

생각지도 않았는데, 바로 그 다음날로 이메일이 날아왔습니다.

그리고 바로 며칠 뒤에 다른 플래카드로 교체되었습니다. 참 감사한 일이었죠.

 

아쉬운 것은 그 다음해에 다시 문제의 그 플래카드가 걸렸다는 것입니다.

교장선생님이 전근을 가신 모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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