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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글 꼬투리

둘레길? 둘렛길!

 

송파구에 둘레길이 완성되었습니다. 주민들이 산책하고 운동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했다는 면에서 매우 의미가 있겠죠. 애쓰신 분들께 감사의 박수를 보냅니다. 그런데 구청에서 이 길을 홍보하면서 사족을 붙였습니다. ‘탄천길이 개통되면서 50년만에 전 코스가 이어졌다.’는 것인데요, 마치 반세기 동안 둘레길을 만들어 왔다는 말처럼 들립니다. 이미 있는 길들은 보완하고, 없는 부분은 이어서 만들었을 텐데 말이죠. 주민들을 위해 기껏 노력을 하고서도 과하게 티를 내려다가 옥에 티를 남긴 꼴입니다.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영감을 얻어, 우리나라 최초로 제주 올레길을 만들었다고 하는데, 둘레길도 그것들에 맥을 잇고 있지 않나 싶습니다. 그 표현은 다소 달라도, ‘둘레길은 우리나라 어디에 가도 볼 수 있습니다. 나라 살림에 여유가 생기기도 한 데다가, 삶의 질을 높이고 싶어 하는 주민들의 바람을, 각 지자체에서 외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상쾌한 바람을 즐기며, 걷고 달리고 자전거를 타는 모습은 상상만으로도 즐겁습니다.

그런데 둘레길은 맞는 표기일까요? 사람들이 보통은 [둘레길]이라고 읽지 않고 [둘레낄] 또는 [둘렏낄]이라고 읽습니다. [둘레][] 사이에서 사잇소리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죠. 한글 맞춤법 제30에 보면, 이런 경우에 사이시옷을 받치어 적는다고 되어 있습니다. '둘레길'은 옳지 않고, '둘렛길'이라고 써야 합니다.

그래서 국민신문고를 두드려 보았습니다. 신문고가 조선 초기부터 있었다고는 하는데, 요즘만큼 활발하게 이용되었을까요? 민원을 넣으면 담당 공무원이 그 진행 과정과 결과를 친절하고 빠르게 알려줍니다.

서울특별시 푸른도시국 자연생태과에서는 아무 문제 없다.’는 간단한 답변을 보내왔습니다.

 

둘레길의 올바른 한글 맞춤법에 대해 국립국어원에 문의한 결과, 서울둘레길의 둘레길은 일반명사로서의 합성어가 아니기 때문에, 어문규범에 따라 사이시옷이 들어가는 된소리 규칙을 적용받지 않는다고 답변하고 있는 바, 우리 시에서 사용하고 있는 둘레길의 표기가 바른 표현임을 알려드립니다.

 

둘레길을 일반명사로 보았다고요? 그렇다면 서울시에서는 '서울 둘레 길'과 같이 띄어 쓰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는 이야기인데, 그렇게 사용한 예를 아직까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나의 과문함이 아니라면, 이 답변은 둘러대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 '둘레길'이 벌써 널리 쓰이고 있으므로, 머지않아 표준어로서 자격을 갖게 될 것입니다. 그때가 되면, 사잇소리 현상이 나타나는 것을 감안해 볼 때, 사전에는 '둘렛길'이라고 등재될 것이 분명합니다. 그때는 서울시에서 둘레길을 고수하기는 어렵겠죠. 공공기관에서 쓰는 명칭이라면, 고유명사라 하더라도 표준발음법을 따라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국민신문고를 두드렸습니다.

 

제 민원의 요지는 이렇습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 둘레길이라는 표현에 익숙해지기 전에, 지금부터라도 둘렛길이라고 바꾸어 표기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앞으로 닥칠 언어 생활에서의 혼란을 해결하는 길일 것입니다. 명칭을 다시 심의해 주시기 바랍니다.

 

빠르게 답변이 돌아왔습니다.

 

서울둘레길은 고유한 길 이름의 고유명사로 붙여쓰기가 가능하며, 또한 둘레길을 둘렛길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둘렛길이 한 단어로 인정되어 국어사전에 등재되고 둘레낄 또는 둘렏낄 등으로 표준발음이 정해져 있어야 사용이 가능하나, 현재는 등재가 안되어 있고 표준발음도 없어 둘렛길로 표기하는 것이 곤란함을 이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먼젓번과 너무나도 흡사한 답변입니다. 이 정도면 도돌이표로 대체해도 될 정도입니다. 민원 내용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자연생태과의 ○○○ 공무원님! “2133-2163로 연락주시면 성실하게 답변드리겠습니다.”라고 하셨지만, 더 이상은 기대하기 어려워 연락드리지 않겠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관()의 문턱은 쉽게 넘을 수 없구나.” 한계를 새삼 실감합니다.

 

참고 자료: ‘~로 끝나는 단어 중에서, 3음절로 된 고유어만 정리하여 덧붙입니다.

고갯길, 고깃길, 고빗길, 굽잇길, 나룻길, 나뭇길, 두멧길, 먼짓길, 모랫길, 바닷길, 바윗길, 벌잇길, 벼룻길, 사랫길, 사릿길, 사잇길, 소맷길, 속귓길, 수렛길, 썰맷길, 쓸갯길, 아랫길, 안갯길, 장삿길, 하룻길, 후밋길(표준국어대사전, 국립국어원)

모두 사이시옷이 씌여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외가 없었습니다.

 

덧붙임: ‘둘레길둘레사물의 테두리나 바깥 언저리를 뜻합니다. 그 지역을 한 바퀴 도는 길에만 써야 합니다. 그렇지 않은 곳에도 쓰는 지자체도 많은데, 제대로 국어 공부를 하고 명칭을 붙이는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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